Hey, I'm 고택 안동김씨 도평의공파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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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도평의공파종택 안동김씨가 사촌(沙村)마을에 정착한 것은 충렬공(忠烈公) 김방공(金方慶)의 6세손 김자첨(金子瞻)이 안동에서 이곳으로 입향해 안동김씨 도평의공파의 입향조가 된 것이 처음이다. 그의 증손자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는 진사에 올랐다가 연산군의 폭정을 보고 고향에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명문가로서 성장하는 기반을 닦았다. 한 집안에서 대과 급제자가 5명이 나오면 대단한 문벌이라고 하는데 이 가문에는 대과 급제가 13명이나 있었다. 그런데도 벼슬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벼슬보다 학문에 정진하는 가풍이 있었다. 안동김씨 도평의공파종택은 김광수의 증손인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이 1576년에 60칸으로 처음 지었다. 김사원은 정조(正祖) 때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에는 김상종(金象鍾)이 의병을 일으켰고 김수담(金壽聃), 김수협(金壽莢), 김수욱(金壽旭)을 위시한 온 가문이 의병에 참여했다. 이토록 모진 역사를 거치고 6.25전쟁까지 겪으며 종택 건물은 상당 부분 파손되었다. 1959년에는 전쟁 후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힘을 합쳐 집을 새로 고쳐 지었고,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2007년에 30여 칸으로 다시 고쳐 지은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현재 안동김씨 도평의공파종택은 대문채와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는 간소한 3칸 규모이며, 가운데 평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이 바로 나타난다. 중문을 가운데로 동쪽의 사랑채는 비교적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중문 서쪽의 사랑채는 한눈에도 동쪽 사랑채보다 오래된 풍모가 난다. 오랜 세월 국난을 당할 때마다 앞장서서 외세에 맞섰던 모진 풍파를 말해주듯 낡지만 곧은 풍채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넓은 대청 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에 두 칸짜리 방이 하나 있고, 서쪽에는 1칸 반짜리 방 두 개, 부엌, 욕실, 1칸짜리 방 하나가 있다. 안마당은 현대식으로 벽돌을 깨끗하게 깔아놓았는데, 구석에 있는 해묵은 아궁이가 옛 정취를 전해준다. (출처: 관광공사 한옥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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